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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기획전시

2023년   <원주 거돈사지 발굴, 237일의 기록>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비

  • 조회수 132
  • 작성자 박물관
  • 작성일 23.10.25

원주 법천사지原州 法泉寺址

법천사지는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에 위치한 법천사의 옛 터이다.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사찰로, 고려시대 제일가는 고승이자 나라의 정신적 지주로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지광국사 해린智光國師 海麟, 984~1067이 젊은 시절 승려의 길로 들어선 곳이자 

말년에 입적入寂[승려가 죽음]한 곳이다. 

법천사의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지만,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 『동문선』 

등에 따르면,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져 고려시대에 이르러 크게 번창했다고 한다. 

홍길동전의 저자로 유명한 허균은 이곳을 방문한 뒤 『유원주법천사기』를 썼는데, 

그 책에 따르면 법천사는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없어진 뒤 폐사廢寺되었다고 한다.

현재 법천사지에서 전하는 유물로는 지광국사탑비(국보), 지광국사탑(국보), 당간지주(강원도문화재자료) 등이 있다.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비原州 法泉寺址 智光國師塔碑

법천사지에 세워져 있는 탑비로, 1070년고려 문종 24년 지광국사가 입적하자 그 공적을 추모하기 위해 

사리탑인 지광국사탑과 함께 이 비를 세웠다. 

비문에는 지광국사의 생애, 행적, 공적을 추모하는 글이 새겨져 있다. 

비문은 당대 문장으로 명성을 떨쳤던 정유산鄭惟産, 미상~ 1091년이 짓고, 

글씨는 안민후安民厚, 미상~미상가 중국의 구양순체를 기본으로 삼아 부드러운 필체로 썼다.

탑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돌을 세우고 왕관 모양의 머릿돌을 올린 모습이다. 

비몸돌에는 양 옆면에 화려한 조각을 새겼는데, 구름과 어우러진 두 마리의 용이 정교하고도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머릿돌은 네 귀가 바짝 들려진 채로 귀꽃을 달고 그 중심에 3단으로 이루어진 연꽃무늬 조각을 얹어 놓았다. 

받침돌의 거북은 목을 곧게 세우고 입을 벌린 채 앞을 바라보고 있으며, 용의 얼굴에 가까운 형상이다.

거북의 등껍질은 여러 개의 사각형으로 면을 나눈 후 그 안에 왕자를 새겨 장식하였다.

(사진 출처: 문화재청)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비 해석문


증시지광국사현묘지탑비명(贈諡智光國師玄妙之塔碑銘)


고려국(高麗國) 원주(原州) 법천사(法泉寺) 강진홍도(講眞弘道) 명요돈오(明了頓悟) 계정고묘응각(戒正高妙應覺) 탐현도원(探玄道源) 통제연오법동(通濟淵奧法棟) 구행요성도수(具行了性導首) 융소낭철(融炤朗徹) 증시(贈諡) 지광국사(智光國師) 현묘탑비명(玄妙之塔碑銘)과 서문(序文).


중대부(中大夫) 문하시랑(門下侍郞)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 판상서예형부사(判尙書禮刑部事) 감수국사(監修圀史) 겸태자대부(兼太子大傅) 상주국(上柱國)인 신(臣) 정유산(鄭惟産)은 왕명(王命)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승봉랑(承奉郞) 상서도관낭중(尙書都官郞中) 비어대(緋魚袋)를 하사받은 신(臣) 안민후(安民厚)가 왕명을 받들어 비문과 전액(篆額)을 쓰다.

신(臣)이 듣건대, 부처[瞿曇彌]께서 묘음(妙音)을 부연(敷演)하시니 삼매[三摩地]에 뻗쳤으며 소반도(蘇槃度)1)로써 고론高論을 성취하였다. 팔식(八識)2)의 근원을 궁구하고 알선하여 유식(唯識) 상응(相應)의 진종(眞宗)을 개창하였고 점차 널리 정교(政敎)를 현양(顯揚)하였으니, 이는 아상(我相)과 팔상(人相)을 벌유(筏喩)에서 경계하고 주재(主宰)와 궤지(軌持)를 나타낸 것이다. 비록 지극한 이치는 허현(虛玄)에 그 근본을 두었으나 평등하여 차별이 없고, 모든 근기(根機)가 영리하고 어리석은 것을 말미암아 깨달음에도 천심(淺深)이 있으니, 우미(愚迷)한 중생을 급인(汲引)함에 있어서는 권실(權實)의 교리(敎理)를 지진(指陳)하였다. 점차 시간이 흘러 부처께서 열반하신 지 더욱 멀어져, 상법시대(像法時代)를 지나 말법기(末法期)에 접어들면서 부처께서 남기신 유문(遺文)이 점점 무너졌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현장법사(玄奘法師)와 같은 고승들이 연이어 세상에 출현하였으며 아수라(阿修羅)의 굴(窟)에 뛰어들어 권권복응(拳拳服膺) 하였으며, 보승(寶乘)을 돈독히 신봉하여 칼날 같은 변재로 널리 홍포(弘布)하였다. 진(晋)나라 때 번역한 경전들의 내용을 승습(承襲)하여 그 오묘한 이치를 터득하고 아울러 무너진 강령(綱領)을 떨쳤으며, 수역(隋譯)된 경전에 따라 그 심오(深奧)함을 끌어내었으니 이는 다 함께 끊어진 흐름을 다시 이은 것이다.

동쪽으로 전래된 법(法)이 특이한 것이 아니니 내면을 살피는 사람[內向者]의 마음들이 그 마음 스스로 통하였다. 그러므로 간간이 위대한 인물들이 나와 선현들의 자취를 밟아 영윤(靈胤)이 되어 그 위명(威名)을 현겁(賢劫)에 떨치고, 계정(戒定) 등의 삼학(三學)을 범제(梵題)에서 연마하였다. 미륵불[慈氏]의 분신이 양무제(梁武帝) 때 강림한 것을 본받았으며, 문수보살이 자취를 나투어 서주(西周) 목왕(穆王) 때 중국으로 불교를 전래한 것과 같다고 하겠다. 널리 동국(東國)인 … 을 교화하되 상법(象法)·정법시대(正法時代)의 법을 크게 홍포하고, 성조(聖祚)를 위해 정성껏 기도하며 임금을 도와 홍균(鴻均)을 이루게 한 분은 오직 우리 국사(國師) 뿐이라 할 것이다.

대사의 휘는 해린(海麟), 자는 거룡(巨龍), 속성은 원씨(元氏), 어릴 때의 이름은 수몽(水夢)이었으며 원주(原州) 출신이다.

고조부와 증조부 때부터 선행을 쌓고 경사스러움을 행하였다. 복희가 만든 역경[犧易]의 안정(安貞)하라는 괘[繇]를 상고해 보건대, 길(吉)·흉(凶)·회(晦)·린(悋) 중의 회(晦)로 말미암아 밝혔으며, 진의 원양[彦升]이 검소하며 절약하였던 가풍(家風)을 지키고 그 순박한 바탕을 깨뜨리지 아니하였다. 할아버지의 휘는 길견(吉肩)이니, 마음은 시초점[筮首]로 점을 쳤으며, 음양(陰陽)을 연구하여 상징을 나타내었으니 어찌 운수가 불길하게 변하는 것을 보고 구차하게 그를 면하려고 하였겠는가! 거북점[鑽龜]을 쳐서 그로부터 얻은 조짐으로 의심하였던 운수를 예지하여 세상일로 하여금 미혹함이 없었다.

아버지의 휘는 휴(休)이니 관직은 아관(衙官)에 이르렀는데, 모든 사람들이 선연(先掾)들보다 뛰어난 관리라고 칭송이 자자하였다. 일찍부터 훌륭한 아들 낳기를 염원하여 항상 초연(椒衍)의 시(詩) 듣기를 원하였다. 어머니는 이씨(李氏)로 영리함은 제호(提壺)에 계합하고 공손함은 거안(擧案)보다 더 얌전하였다. 끝없는 원력(願力)은 광목부인(光目婦人)과 같고 용모의 아름다움은 묘안(妙顔)임을 알 수 있다. 일찍이 성선(聖善)의 태몽에 하해(河海)의 물이 맑게 범렴(泛瀲)하고 정천(井泉)에서는 물이 솟아올랐다. 이로 인하여 임신하고는 일과로 탄기(呑氣)를 행하여 태아를 교육하였다. 기운을 머금거나 거인의 발자욱을 밟아 임신했다는 자취보다 더 기이한 것이다. 어찌 강원(姜嫄)이 임신을 탁태(託胎)하려는 일 따위를 부러워하랴. 지광국사의 탄생은 왕소(王邵)의 경우에 부합한다. 이미 만삭이 되어서는 드디어 그 상서(祥瑞)를 드러내었다. 옹희(雍熙) 원년(성종 3, 984) 갑신년 12월 그믐날 사제(私第)에서 탄생하였다. 그래서 어릴 때의 이름은 수몽이었다.

옛날 중국에서 주(周)나라 명왕(明王) 24년에 강하(江河)와 천지(泉池)가 홀연히 범람하였으니, 이것이 부처께서 탄생하신 상서였는데, 이것을 우리 국사의 탄생과 비교하면 그 시종(始終)의 징조가 하나도 다름이 없다. 국사는 일자분정(日蔗分精), 즉 태양의 정기를 타고 났으며, 연꽃과 같은 향기롭고 아름다운 성품을 받아 태어났다. 탐애(貪愛)를 없애는데 예리하였고 색신(色身)과 명예(名譽)를 위하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7, 8세[齠年]의 나이에 이르러 이미 학문에 뜻을 두어 이수겸(李守謙)을 찾아가서 학업을 청하였다. 수겸이 국사를 보고 특이한 그릇인줄 알고 말하기를, “나는 석학(碩學)이 될 기량(器量)을 지도할 능력이 없으니 너는 마땅히 밝은 스승을 찾도록 노력하라” 하였다. 어느 날 관상을 잘 보는 한 노인이 있어 국사의 손금을 보고 국사에게 이르기를, “네가 만약 출가한다면 반드시 세상에서 가장 귀한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다. 앞으로 통인달사(通人達士)가 되리라는 말을 듣고 다만 도주(道籌)에 종사할 생각에만 골똘히 잠기고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에는 관심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노장(老莊)의 개설(槪說)에 대해서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따라서 사대부들의 헌면(軒冕)을 치수(錙銖)처럼 보고 고량진미(膏粱珍味)를 마치 강비(糠秕)와 같이 여겼다. 급히 서둘러 법고사(法皐寺)의 관웅대사 처소로 가서 수학하던 중 관웅대사가 경화(京華)인 개성으로 떠났으므로 국사도 그 산중(山中)을 하직하고 떠나게 되었다. 관웅대사가 배를 타고 강을 건너 오운산(五雲山)을 벗어나자마자 국사는 곧 걸망을 짊어지고 따라갔다. 천리를 멀리 여기지 않고 함께 연하(輦下)로 돌아갔다. 이어 곧 산의 서쪽을 점지(占地)하였는데 해안사(海安寺)와 선접(旋接)한 곳이다. 준광방장(俊光方丈)에게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수도(修道)하면서 함장(函杖)에게 욕의(縟儀)를 펴고 시봉하기를 희망하며 게송[貫花]을 외며 불경[縹帙]을 정성껏 연마하였다. 위(魏)나라의 창서(蒼舒)가 코끼리의 무게를 작은 저울로 알아내던 나이에 이미 불교를 전해 듣고 알았으며, 가위나국(迦衛羅國) 구오사미(驅烏沙彌)의 류(類)와 같은 어린 나이에 이미 모든 사람들이 금공(金公)이라 존칭하였다. 그는 기연(機緣)을 검괄(檢括)하여 종요(宗要)를 격양(激揚)하되, 한 가지를 들으면 천 가지를 깨달아 진도(進度)의 결과가 그의 엄사(嚴師)보다 배(倍)나 높았다.

양지(兩智)3)와 삼명(三明)4)으로 도덕이 높아 부처의 혜명(慧命)을 계승하였다. 이와 같이 영특함을 알게 된 웅공(雄公)은 기꺼워하면서 해린이란 법명을 주었다. 통화(統和) 17년(목종 2, 999) 4월[首夏之月]에 용흥사 관단(官壇)에서 구족계를 품수(稟受)하였다. 탐·진·치의 마음을 씻어 그 오염(汚染)을 여의었으니 마치 손으로 공중(空中)에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았다. 18세에 숭교사(崇敎寺)를 창건할 때 감독을 맡았던 은공(恩功)으로 그 절의 초대(初代) 주지가 되었다. 자운사(慈雲寺)에서 거행하는 창살도량(唱薩道場)에 나아가서 부처께 향을 올려 기도하였다. 어느 날 관웅대사가 법천사(法泉寺)에서 잠을 자고 있는 동안 꿈에 새매 한 마리가 날아오는 것을 보고 왼쪽 손을 펴서 손바닥에 받들었다. 또 두 마리의 호랑이[山君]가 절 후원(後園)에 들어와서 서로 뛰고 놀다가 날이 밝아지자 떠나간 일도 있었다. 관웅대사가 이를 이상하게 여겨 기억하고 있었는데, 다음 날 국사께서 본사本寺를 찾아왔으니 이것이 바로 그 꿈의 감응(感應)인 것이다. 또 어느 날 꿈에 바닷가에 가서 손으로 직접 작은 고기를 잡아서 삼키고 꿈을 깨었는데, 해몽하는 사람이 말하기를, “물고기는 비늘[鱗]이 있다”고 하여 린(麟)을 린(鱗)으로 고쳐 해린(海麟)을 해린(海鱗)으로 개명(改名)하고, 자(字)를 거룡(巨龍)이라 하였다.

나이 21세 때 왕륜사(王輪寺) 대선장(大選場)에 나아가서 담경(談經) 시험을 보았는데, 그의 말은 평범하나 그 뜻은 매우 심오하였다. 시험의 문제는 같았으나 국사의 답안은 다른 사람들보다 특이하였다. 저들 자신의 답안이 틀려서 자신의 소망에 어긋난 자들은 마치 장님이 촛불을 잡은 것과 같았으며, 혹은 시기하여 추하게 다투던 자들은 마치 입에 막대기를 문 것[銜杖]처럼 입을 열지 못하였다. 마음에는 모든 인연이 쉬었으니 감히 파도가 물에 의지한 것을 탄식할 것이며, 진여법(眞如法)은 모든 움직임을 떠났으니 응당 풀무[槖籥]가 바람을 빌려줌을 비웃을 것이다. 토의하는 광장(廣場)에서는 주위로부터 집중적인 공세를 받았으나 마치 교범바제(憍梵婆提, gavāṃpati) 등의 호부장자(豪富長者)들로 구성된 사람들이 무너지고 모두 논리에 강복(降伏)하고 부처님께로 귀화한 것과 같았다. 견고한 인욕의 갑옷이여! 니건자(尼軋子)를 비롯한 외도(外道) 육사(六師)들의 일(一)·이(異)·유(有)·무(無) 등의 교란적인 주장이 부처의 사자후(獅子吼)로 모두 사라진 것과 같았다. 국사께서 법상(法床)에 앉아 불자(拂子)를 잡고 좌우로 한번 휘두르니 평상이 부러질 정도로 많은 청중들이 모여들었다. 임금이 국사의 도덕을 찬양하고 대덕(大德)의 법계를 서증(署贈)하였다. 이 때 국사께서 이르기를, “내가 의룡(義龍)과 서성(瑞聖)보다 뒤에 있는 것은 부끄럽지만 인수(仁獸)보다는 앞서기를 기대하므로 법명의 린(麟)자를 린(鱗)으로 고치겠다”고 하였다. 통화(統和) 연간(성종 2~현종 3, 983~1012)에 ‘강진홍도(講眞弘道)’란 법호를 받았으며, 28년(현종 1, 1010)에는 국사께서 법고사(法皐寺)로 돌아가는 길에 도강(都講)인 진조(眞肇)대사를 만나 동행하다가 진조대사가 역산(曆算)하는 법을 잘 안다는 말을 듣고 국사께서 가르쳐 주기를 청하였는데, 원칙을 알게 되니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 쉽고, 헤아리는 법을 알게 되니 장님이 눈을 뜬 것처럼 밝게 알게 되었다. 이는 보통 무리들에게서 여용(餘勇)을 구하고, 비사(鄙事)에서 다능(多能)을 연구함과 같았다. 통화(統和) 말년(현종 3, 1012) 우리 성고(聖考) 현종(顯宗)께서 보위에 오르신지 5년째 되던 해(1014)이다. 특히 현종 임금으로부터 존장(尊獎)하는 은총을 입어 대사(大師)의 법계를 받았다.

대중상부(大中祥符) 10년(현종 8, 1017)에는 ‘명료돈오(明了頓悟)’란 법호를 증사(贈賜)받았고, 천희(天禧) 5년(현종 12, 1021) 개경[鎬京] 중흥사(重興寺)에서 여름 결제(結制) 중에 강경법회가 있었는데, 국사께서 법을 설하시니, 그 법의 혜택이 화택 중생들에게 두루 미쳐 마치 새벽 기온처럼 청량(淸凉)하게 만들어 주었다. 자비의 등불을 혼구(昏衢)의 밤거리에 비추어 인도[竺乾]의 달마가 서쪽에서 전해 온 뜻[西來密旨]을 깨닫게 하였다. 국사가 매일 한 번씩 기자(箕子)의 고도(古都)를 일컬으면 대중은 세 번씩 창송하였다. 그 후 기숙(耆宿)과 선공(先公)들이 지은 사회(社會)의 사소(詞疏)가 문리(文理)가 맞지 아니함을 보고 고쳐 지어주면서 … 쓸데없는 말들은 잘라 버렸다. 국사는 아무렇게나 말을 하여도 곧 훌륭한 문장을 이루었으니, 혜거(惠璩)의 문장력도 혼비백산하였고, 문장을 읊으면 척척 음운에 부합하였으니 담빙(曇憑)의 음운학(音韻學) 실력도 부끄러워할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주연(遒姸)하고 민첩함을 누가 능히 그를 적대(的對)할 수 있겠는가!

태평(太平) 연간(현종 12~22, 1021~1031)에 중대사(重大師)의 법계를 진정(進呈)하고 아울러 ‘계정고묘응각(戒正高妙應覺)’이란 법호를 올리고는 수다사(水多寺)를 맡도록 하였다. 태평 10년(현종 21, 1030)에 이르러 현종이 칙명으로 해안사(海安寺)로 이주하도록 앙청(仰請)하였다.

그 후 덕종(悳宗)이 즉위하여서는 보다 더욱 존중히 모시는 한편 특별히 삼중대사(三重大師)의 법호를 수정(授呈)하고 아울러 마납(磨衲)으로 만든 법복 한 벌을 증사(贈賜)하였으며, ‘탐현도원(探玄道源)’이라는 법칭(法稱)을 첨가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수좌(首座)의 법호를 올리고 겸하여 마납 복전의(福田衣)한 상자를 하사하였다. … 어찌 우물 안 개구리가 바다의 깊음을를 측량할 수 있겠는가. 승려[緇流]들이 환희심에 넘쳐 경하(慶賀)하자 국사는 쓸데없이 서로 축하는 것을 경시[却輕廈燕之投]하였으니, 마치 부처[覺王]의 출세가 아닌가 하여 의심할 정도였다. 다행히 어진 임금[仁主]과 동시대에 출세하여 그의 법음(法音)은 바다를 덮을 정도로 한량이 없으며, 현하(懸河)와 같은 변재는 그 도도하며 민첩함을 이루 다 형언할 수가 없다.

중희(重熙) 연간(덕종 1~문종 9, 1032~1055)에 ‘통제연오법동(通濟淵奧法棟)’이라는 법호가 가상(加上)되었다. 갑자기 어느 날 선조(宣詔)를 보내 궁내로 영입하여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연설토록 하였다. 국사는 궁중의 높은 섬돌을 밟고 예상(猊床)인 법상에 올라 앉아 법우(法雨)를 내려주어 진리를 표하고 정법(正法)을 나타내었다. 우거(牛車)에 따른 오지(奧旨)의 관기(關箕)를 활짝 열어 무명인 혹(惑)을 전제(剪除)하고 의문(疑問)의 구름을 휘산(揮散)하였다. 맹구우목(盲龜遇木)과 같이 만나기 어려운 묘법(妙法)을 들은 임금은 마음에 크게 감동하였으니, 어찌 귀중한 보배와 사사공양(四事供養)을 하사하는데 인색하였겠는가! 특별히 가는 실로 수를 놓은 당상복(幢相服) 두 벌을 하사하였다. 14년(정종 12, 1045)에는 승통(僧統)의 법계를 올렸다. 지금의 임금이신 문종이 즉위하여 하(夏)나라의 정통을 계승하여 국민에 임하였으며, 마치 주(周)나라의 무왕(武王)이 은(殷)나라의 폭군 주왕(紂王)을 견제하고 인정(仁政)을 펴서 홍업(洪業)은 이미 의삭(懿鑠)에 이르렀으며, 깊고 돈독한 정성[瀹誠]은 귀의[那摩]하고자 함이 간절하였다. 왕이 국사를 임궁(琳宮)으로 초빙하여 유심(唯心)에 대한 묘의(妙義)를 강설케 하고는 마납 비단으로 만든 승가리(僧伽梨) 한 벌을 하사하였다. 궁중(宮中)의 구중(九重)에서 부의(負扆)하고 있는 임금께서 친히 상보(象步)하는 용상대덕(龍象大德)들을 영접한 백고좌(百高座)는 모두 용문(龍門)을 뛰어넘는 오도견성(悟道見性)한 도인들이었다. 승려 담수(曇邃)는 북좌(北座)에서 정통(精通)하였음을 부끄러워했고, 승철대사(僧徹大師)는 편독(篇牘)과 시부(詩賦)에 뛰어나 낙필성장(落筆成章)하는 문호(文豪)이므로 많은 대덕(大德)들을 제치고 왕으로부터 총석(寵錫)받은 것을 사양할 정도였다. 그리고 중희(重熙) 연간에 거듭 다시 ‘구행료성도수(具行了性導首)’라는 법호를 첨가(添加)받았다. 또 기원(祇園)의 적손(嫡孫)이니 이는 오직 불교가 중흥할 인유(因由)인 것이다. 척리(戚里)의 신동(神童)들이 예문(禮聞)을 거치지 아니하고 와서 수학하였다. 그래서 작고(作故)하신 수대사(守大師)의 문하시중(門下侍中)이며 중서령(中書令)을 추증(追贈)받은 장사공(章私公) 이씨(李氏), 휘(諱) 자연(子淵)은 다섯째 아들이 출가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로 하여금 삭발[落]하고 정성을 다하여 국사에게 구의(摳衣)하고 신족(神足)이 되어 복근(服勤)하기를 희망하였다. 그리하여 국사가 직접 찾아가서 친견하고 찬앙(讚仰)하였으니, 그 분이 누구인가? 지금의 금산사(金山寺) 주지로 있는 삼중대사(三重大師)인 소현(韶顯)이 바로 그 분이다. 소현대사는 부모를 하직하고 속가를 떠나 입산(入山)하였다. 음식을 항상 절제하여 묘재(卯齋)인 아침 공양만 먹었다. 초액(椒掖)의 후비(后妃)를 살펴 보건대 모두가 동기(同氣)이며, 악루(萼樓)의 형제들이 외손(外孫)이다. 이러한 사람이 도(道)의 극치를 이루었을 뿐 아니라 유교와 불교를 두루 통달하여 그와 대등한 자가 없었다. 덕행(德行)과 문장(文章)이 노당(魯堂)의 십철(十哲)을 크게 엄압(掩壓)였고 자비와 지혜는 위사(魏寺)의 천승(千僧)보다 훨씬 초월하였다. 자질(資質)은 현반(玄班)을 크게 높였고, 법력(法力)은 온 세상의 중생을 부호(扶護)할 만 하였다. 장려한 국사의 문하(門下)가 왕성하여 국사보다 더 큰 경우는 없었다.

중희(重熙) 23년(문종 8, 1054) 8월[南呂月]에 성칙(聖勅)을 내려 현화사(玄化寺)로 이석(移錫)하게 하자 국사는 고사하였으나 어쩔 수 없이 허락하였다. 임금께서 유마(騮馬) 일필(一匹)을 희사(喜捨)하여 , 먼저 절에 바쳤다. 갑자기 한 비구가 와서 말을 희사한 것에 대해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는 잠시 후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어져 간 곳을 알지 못하였으니 이는 성승(聖僧)의 영험인 것이다. 현화사에 입사(入寺)한 후 어느 날 새벽꿈에 한 스님과 같이 있었는데, 그 곁에 있던 신인(神人)이 말하기를, “당신은 국사(國師)이고, 그는 왕사(王師)이다”라고 하였다. 잠에서 깨었으나, 그가 말한 소리는 여전히 귀에 역력하였다. 아름다운 징조이며 특별한 서록(瑞錄)이라 칭송되어 길음(吉音)이 환구(環區)…인 온 세상에 가득 하였다. 하물며 국사가 어찌 내종(內宗)에만 편국(偏局)하였겠는가! 외전(外典)도 두루 겸통(兼通)하였다. 날 때부터 이미 여러 가지 묘법을 알았을 뿐 아니라, 숙령(夙齡)의 어린 나이에 주발(朱勃)과 같은 천재를 능가할 정도의 재동(才童)이었다. 아주 많은 서적을 독파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혜초(惠超) 스님을 능가하였다고 칭송이 자자하였다. 학사(學士) 뿐만 아니라, 사봉(詞峯)은 태양을 의지하며 필총(筆塚)은 하늘을 받들었다. 경구(警句)를 독실하게 공부하여 거유(鉅儒)로써의 과문(寡聞)한 이에게 영향을 입혔다. 화탕(和湯)한 개사(開士0가 벽운시(碧雲詩)의 아작(雅作)을 읊었으니, 이것이 어찌 괴기(瓌奇)한 명문(名文)이 아니겠는가! 이에 비하면 이적선(李謫仙)의 백설시(白雪詩)의 청음(淸吟)도 진실로 쇄미하다고 할 것이다. 치소(緇素)의 무리들과 비교하더라도 또한 동년(同年) 선상(線上)에 두고 말할 수 없다. 유교와 불교를 기빙(期憑), 즉 비교해 보건대, 범복(梵福)이 더욱 수승하였다.

왕[宸圖]은 정재(淨財)를 기울여 현화사의 보수공사에 필요한 공사비를 국가에서 부담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개필(愷筆)을 불러 수용(睟容)의 탱화를 그리고 한편으로는 부종(鳧鍾)을 주조하며, 일체법구(一切法具)를 마련하였다. 이와 같이 보수한 보찰(寶刹)은 그 장려함이 마치 도사다(覩史多)의 천궁(天宮)을 옮겨 놓은 것과 같았다. 금언(金言)인 경전을 판각(板刻)하여 명(名)·구(句)·문(文)인 구나(拘那)5)의 용궁해장(龍宮海藏)을 담았으니 이것이 이른바 처음 행한 보시[始檀]라 하겠다. 그리하여 사홍서원(四弘誓願)을 일으켜 마침내 원만하게 성취하고, 임금이 지광국사(智光國師)를 스승으로 모시고 사자(師資)의 큰 인연을 맺었다. 이와 같이 모든 악(惡)은 짓지 아니하는 한편 여러 가지의 선(善)한 일을 봉행(奉行)한 일들을 어찌 이루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청녕(淸寧) 2년(문종 10, 1056) 10월 일에 임금께서 이르기를, “대붕새도 늙어지면 법이 아니면 그 미혹(迷惑)함을 구제할 수 없고 성스러운 병아리라도 스승이 아니면 법익(法益)을 청할 수 없다. 진실로 능히 법을 깨달은 이라야 가히 스승이 될 수 있다”라고 말하며, 특별히 국서(國書)를 보내 초청하였다. 드디어 공부시랑(工部侍郞) 장중영(張仲英), 상서(尙書) 좌승(左丞) 유신(柳紳)과 예부시랑(禮部侍郞) 김량지(金良贄) 등을 보내되, 세 번이나 되풀이하는 삼반(三反)의 예(禮)를 갖추고는, 이어 다시 중추원사(中樞院事) 이유충(異惟忠)을 보내어 왕이 수결(手結)하고 압인(押印)한 편지와 함께 금계법복(錦罽法服)과 은(銀), 황유(黃鍮)로 만든 기물(器物)과 향천(香荈) 등을 보냈다. 국사는 굳게 사양하였으나 마침내 왕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그 해 11월 4일 대가(大駕)가 내제석원(內帝釋院)으로 행행하여 예배(禮拜)를 갖추어 왕사로 추대되었다. 그 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어가(御駕)에 동재(同載)하고 다녔으니, 마치 강거국의 승회(僧會)대사가 오왕(吳王) 손권(孫權)의 어가에 동승하고 다녔던 것처럼 모두 국사의 도풍(道風) 아래에 있었기 때문이다.

청녕(淸寧) 3년(문종 11, 1057)에 이르러 ‘융소(融炤)’라는 법칭(法稱)을 진정(進呈)하였다. 4년(문종 2, 1058) 5월 초하루에 임금께서 국사로 책봉하고자 친서를 보내 삼청(三請)하였다. 그리하여 그 달 19일 왕이 금가(金駕)를 준비해 봉은사(奉恩寺)로 행행하여 해린왕사를 국사로 봉하고, 영통사(靈通寺)의 주승(主僧)인 난원(爛圓)을 왕사로 책봉하였다. 연진(涓辰)을 택하여 위대한 칭호(稱號)인 법칭(法稱)을 봉정(奉呈)하였으니, 양상(兩相)이 부합되었다. 같은 날에 두 분이 함께 지총(摯寵)을 받았으므로 두 아름다운 일이 동시에 나타난 것이다. 그 까닭을 살펴보니 미증유(未曾有)의 희유(希有)한 일이라고 찬탄하고도 남음이 있다. 전일의 꿈에 신인(神人)이 “당신은 국사이고, 그는 왕사이다”라고 한 예언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때 꿈에 동유(同遊)하던 승려가 바로 영통사의 주지승 난원이다. 5년(문종 13, 1059) 10월[陽月] 8일 국사께서 왕궁 내전(內殿)에 나아가서 백고좌회(百高座會)의 제일설법주(第一說法主)가 되었다. 겨우 반게송(半偈頌)을 설하자마자 청법 대중이 사방(四方)으로부터 모여들어 큰 상서를 나타냈다. 왕이 다시 ‘낭철(朗徹)’이라는 법칭을 진정(進呈)하였다. 함옹(咸雍) 3년(문종 21, 1067) 2월 일에 국사께서 법천사(法泉寺)에 돌아가 안주(安住)하고자 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모치(暮齒)의 탄식을 일으키며, 누차 임금께 사퇴(辭退)할 것을 고진(告陳)하여 세 번이나 거듭 수두(需頭)의 주청(奏請)을 올려 간절한 사의(辭意)가 확고함을 알렸다. 문종은 하는 수없이 윤허(允許)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해 9월 22일 왕이 현화사(玄化寺)에 행행(幸行)하여 합원승재(闔院僧齋)를 베풀고 겸하여 국사를 석별하는 인전연(寅餞筵)도 마쳤다. 임금은 양반의 관솔(官率)을 거느리고 국사에게 하직 인사를 한 다음, 좌승선(左承宣)이며 중서사인(中書舍人)인 정유산(鄭惟産)을 파견하여 수결(手結)을 찍은 조서(調書)와 차(茶), 약(藥), 보화(珤貨) 등을 정상(呈上)하였는데, 그 이름과 수가 너무 많아 산제(刪除)하고 싣지 않는다. 국사는 이달 27일 출발하여 본산(本山)인 법천사로 떠났다.

임금이 태자(太子)에게 명하여 제왕백료(諸王百僚)를 거느리고 남교(南郊)까지 가서 전별(錢別)하게 하고 특별히 도속(道俗)의 관원(官員)을 보내어 본사(本寺)까지 호송(護送)토록 하였다. 국사께서 본산인 법천사에 돌아간 후, 3년 뒤 5월[仲夏之月]에 문종[聖上]이 연덕궁(延德宮)의 제6왕자에게 체발(剃髮)하고 승려가 되어 현화사에 있게 하였다. 이전에 봉천원(奉天院)에 주석하다가 특별히 수좌(首座)의 법계를 증수(贈授) 받았으니, 이는 국사의 주변에 있으면서 깊은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이 해 10월 23일 편안히 우협(右脇)으로 누워 취침하였다. 이날 밤에 이슬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국사께서 잠을 깨어 가부좌(跏趺坐)를 맺고 앉아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 바깥 날씨가 어떤가?”하니 대답하기를, “이슬비가 내리고 있습니다”라는 대답을 듣고서 곧 입적하였다. 옛날 추자(鶖子)가 입적(入寂)함에 당하여 무색계(無色界)의 제천(諸天)이 흘린 눈물이 마치 봄에 내리는 이슬비와 같았으니, 지금 국사께서 시화(示化)하던 오늘밤에 내린비인들 어찌 제천(諸天)이 흘린 눈물이 아니겠는가.

오호 애재(哀哉)라! 세수는 87세요, 승랍은 72년이었다. 입적하던 전날 밤에 등불만한 크기의 두 별이 나타났고, 또 두 줄기의 큰 무지개가 섰는데, 마치 두 마리의 적룡(赤龍)이 나란히 누워 있는 것과 같았다. 이것은 … 국사께서 입멸(入滅)하실 조짐을 보인 것이다. 문인(門人) 수좌(首座)인 법령(法靈)과 삼중대사인 소현 등이 가슴을 치며 발을 구르면서 부음(訃音)을 궁중[彤陛]에 주문(奏聞)하였다. 부음을 들은 문종(文宗)은 크게 진도(震悼)하시고 곧 좌도승록(左街僧錄)인 숭연(崇演)과 보장정(保章正)인 전삼린(全參藺) 등을 파견하여 장사(葬事)를 감호하도록 하였으며, 이어 전개(專介)인 특사를 보내서 빈당(殯堂)에 가서 조문토록 하되 정중한 탁제(卓祭)를 치르도록 하는 한편, ‘지광(智光)’이라는 시호를 증정(贈呈)하고 아울러 다향(茶香)과 유촉(油燭)을 하사하였으며, 또 원주(原州) 창고에 있는 양곡으로써 발천위락(拔薦爲樂)의 법요식(法要式)에 필요한 경비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11월 9일 법천사의 명봉산(鳴鳳山) 동쪽 승지(勝地)를 선택하여 다비(茶毗)의 예를 거행하였다. 이 때 인간과 영기(靈祇)가 비통하며 슬퍼하고, 천지(天地)가 캄캄하며 새·짐승들은 슬피 울고, 봉만(峰巒)은 처참하게 나열(羅列) 되었으니, 유정(有情)과 무정(無情) 등이 모두 국사의 도덕이 끝남에 대하여 슬퍼하였다.

임금께서 아름다운 궤범(軌範)을 추모하여 감히 제액(題額)을 표(標)하지는 못하지만, 황견유부(黃絹幼婦)인 절묘호사(絶妙好辭)의 명문(名文)을 새긴 비석[貞珉]을 세워 국사의 위적(偉跡)이 영원히 썩지 않게 하고자 하였다. 불타야사[赤髭]와 같은 위대한 행적을 빛나게 할 뿐 아니라 역대(歷代)에 유전되어 영원히 남아 있게 하고자 하여, 이에 추유(鯫儒)에게 명하시어 국사의 홍대(鴻大)하고 탁렬(卓烈)한 위업을 밝히라고 하셨다. 그러나 신의 식견(識見)은 우잠(牛涔)으로 토해(兎海)의 물을 측량하는 것과 같아서 불가능한 일이라고 사양하였지만 어찌 할 수 없었다. 윤선(綸宣)을 받드는 것은 도저히 더 이상 사양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국사의 가풍(家風)에 따라 그의 도덕을 기록하였다. 비록 견고하나 돌과 같이 궁구는 마음은 아니며 학문은 부수(膚受)이고 재조(才操)는 졸재(拙才)이다. 스스로 수중에는 한 푼의 돈도 없음을 부끄러워하면서도 문득 기백[狂斐]의 명문(名文)을 지으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할 뿐이다. 삼가 이상의 탁적(卓跡)을 명(銘)으로 칭송(稱頌)한다.


무상심심(無上甚深) 미묘법(微妙法)은

석가(釋迦)가 시조!

서건(西乾)에서 처음 시작하여

가섭축법(迦葉竺法) 두 승려가 동전(東傳)하였네!

일체법장(一切法藏) 진속(眞俗)으로 나누어

근기(根機)따라 설해졌네!

미(迷)한 중생(衆生) 제도하고자 정법(正法)을 보여

실상법(實相法)을 기본으로 권법(權法) 설했네!

무상대교(無上大敎) 그 진리를 널리 펴시니

많은 중생들이 서열(胥悅)하도다.

자성천(自性天)의 혜일광명(慧日光明) 두루 비추니

언덕과 골짜기 모두 밝아졌었네!

자비하신 구름으로 윤택하게 할 때

쑥과 난초(蘭草) 차별 없이 적셔주었다.

불타(佛陀)가 열반하고 시간이 흐르니

남기신 유풍(遺風)이 멸절(滅絶)해 가네!

부처의 유풍을 누가 이을까?

지광국사만이 감당할걸세.

여러 생에 혁기(赫氣)모아 태어났으니

단적(端的)으로 밝은 시대 만났도다.

양친부모(兩親父母) 하직하고 애정(愛情)을 끊어

속가(俗家) 옷인 소의(素衣) 벗고 치의(緇衣)를 입었네.

고상함은 석림(釋林) 가운데 악봉(萼鳳)이시고

신령(神靈)함은 상서로운 시귀(蓍龜)와 같네!

지극하신 정성으로 발심(發心)하였고

입으로는 발원(發願)하고 반야(般若)를 닦았다.

안으로는 팔만장경(八萬藏經) 연구하면서

밖으로는 유학(儒學)과 문장도 뛰어나셨네.

품계(品階)는 십지(十地)이시고

거룩하신 그 칭송(稱頌)은 천하에 떨쳐

복과 지혜(智慧) 함께 구족(具足) 하시어

견줄 자 드물다네!

계현논사(戒賢論師) 화현(化賢)으로 다시 오신 듯

무착보살(無着菩薩) 도생(度生) 위해 거듭 나투다.

반야덕(般若德)의 병(甁) 속에는 진리 가득히

거울같이 밝은 마음 더욱 밝도다.

모든 상문(桑門) 수행자(修行者)의 표본이 되고

왕궁[蘂闥]까지 그 이름이 가득하였다.

임금[瑤皇]께서 초빙하여 법문(法門) 들었고

사원[寶世]에는 수도대중(修道大衆) 번영하였다.

천자의 스승인 국사가 되셨고

모든 일은 천도에 부합되게 처리하셨네.

자나깨나 국민 위한 일념(一念) 뿐이며

영원토록 큰 원력(願力)을 굳게 품으셨다.

나이 들어 위태로움에

임금께 은퇴를 요청하셨네.

여산(廬山)같은 본산으로 되돌아가서

정진(精進)하고 기도하여 고년(高年)을 바라셨네.

몸은 비록 무루(無漏)하지만

명(命)은 어쩔 수 없이 무너졌네.

아름다운 제호(醍醐) 맛도 맛을 잃었고

향기롭던 담복향(薝蔔香)도 향기가 없네!

대소관원(大小官員) 전재(筌宰)들은 여탄(茹歎)하였고

오장육부(五臟六腑) 오려내듯 슬퍼하였다.

백성[黎夷]들도 너나없이 슬퍼하네.

마치 부모 잃은 아이처럼.

슬퍼하는 제자들은 봉둔(蜂屯)과 같고

그 유언에 감동함은 적자(赤子)와 같네!

북수(北首)하고 입적하니 세우(細雨) 내리고

남(南)을 향해 비를 세워 표본(標本)을 삼으니

설혹 바다가 막히고 강이 없어지며

지금 사람 사라지고 새 사람이 와도

국사의 맑은 덕과 그 웅명(雄名)은

미래제(未來際)가 다하도록 영원하소서.


비서성(秘書省) 배융교위(陪戎校尉) 신(臣) 이영보(李英輔)와 대장(大匠)인 신(臣) 장자춘(張子春) 등이 왕명을 받들어 비문을 새기다. 


1) 소반다(蘇槃多)라고도 한다. 범어(梵語)의 문법상에 있어 변화됨을 말한다. 

2) 유가유식학(瑜伽唯識學)에서 이야기하는 8종류의 인식으로, 제1 안식(眼識), 제2 이식(耳識), 제3 비식(鼻識), 제4 설식(舌識), 제5 신식(身識), 제6 의식(意識), 제7 말나식(末那識), 제8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말한다. 

3) 이지(二智)라고도 하며, ①여리지(如理智)와 여량지(如量智) ②근본지(根本智)와 후득지(後得智) ③진지(眞智)와 실지(實智) ④무착지(無着智)와 무애지(無礙智) ⑤차별지(差別智)와 무차별지(無差別智) ⑥진지(眞智)와 속지(俗智) ⑦권지(權智)와 실지(實智) 등으로 진리에 대한 지혜와 구체적인 세속에 대한 지혜를 의미한다. 

4) ①전생의 일을 밝게 아는 숙명명(宿命明) ②수천 수만리를 꿰뚫어보는 천안명(天眼明) ③모든 번뇌가 다한 누진명(漏盡明)을 가리킨다. 

5) 과거 7불(佛) 중 다섯 번째 부처로 구나함모니(拘那含牟尼, Kanaka-muni)이다. 갈락가모니(迦那伽牟尼)라고도 음역(音譯)되며, 바라문 가정에서 출생하여 오잠바라수(烏暫婆羅樹) 아래에서 성도하였으며, 1회의 설법으로 3만의 비구를 제도하였다.

(해석문: 국립문화재연구원 https://portal.nrich.go.kr/kor/ksmUsrView.do?menuIdx=584&ksm_idx=3161)